와타나베 가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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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와타나베 가잔은 일본 에도 시대 후기의 화가, 사상가, 정치가이다. 가난한 사무라이 가문에서 태어나 어려서부터 그림에 재능을 보였으며, 다하라 번의 가로를 역임하며 번정 개혁을 추진했다. 서양화의 영향을 받아 독자적인 화풍을 구축했으며, 초상화, 풍속화 등 다양한 작품을 남겼다. 덴포 기근 당시 백성을 구제하고 개국론을 주장했으나, 만사의 옥에 연루되어 할복했다. 주요 작품으로는 「타카미 센세키 초상」, 「사토 이사이 초상」, 「일소백태도」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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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타나베 가잔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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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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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명 | 와타나베 사다야스 |
출생 | 1793년 10월 20일 |
출생지 | 다하라, 일본 |
사망 | 1841년 11월 23일 |
다른 이름 | 화산 (華山) 백등 (伯登) 자안 (子安) 전락당 (全楽堂) 우화당 (寓画堂) |
묘소 | 벤텐 산 조호지 (아이치현 다하라시 다하라초 히에다) |
막부 | 에도 막부 |
섬긴 주군 | 미야케 야스토모 미야케 야스카즈 미야케 야스아키 미야케 야스나오 |
가문 | 와타나베 씨 |
가족 | 아버지: 와타나베 사다미치 어머니: 에이 형제: 가잔, 와타나베 조잔 배우자: 타카 자녀: 가쓰, 와타나베 이치카쿠, 와타나베 쇼카 |
관직 | |
추증 관위 | 증 정4위 |
휘 | |
개명 | 겐노스케 (源之助) 도라노스케 (虎之助) 노보루 (登) 사다야스 (定静) |
시호 | 문충원 화산 백등 거사 (文忠院崋山伯登居士) |
직업 | |
직업 | 화가 학자 |
중국어 정보 | |
간지 | 渡辺 崋山 |
로마자 표기 | Watanabe Kazan |
히라가나 | わたなべ かざん |
참고 사항 | |
참고 사항 | 상기 이미지는 제자 쓰바키 친잔이 가잔 사후 12년 뒤인 가에이 6년 (1853년)에 그린 것이다. 다하라 시 박물관 소장. 중요 문화재. |
2. 생애
에도 시대 후기의 사무라이이자 화가, 난학(蘭學)자이다. 다하라 번의 번사 가문에서 태어났으나 가세가 기울어 어려운 유년 시절을 보냈다. 생계를 위해 그림을 그리기 시작하여 뛰어난 재능을 발휘했고, 타니 분초 등의 스승에게 배우며 화가로서 명성을 얻었다. 동시에 유학과 농학 등 학문에도 힘썼다.
다하라 번의 번주를 가까이에서 모셨으며, 훗날 번의 가로가 되어 번정 개혁을 주도했다. 특히 덴포 대기근 시기에는 철저한 대비와 구휼 정책으로 번 내에 아사자가 나오지 않게 하여 막부로부터 표창을 받기도 했다. 그는 쇄국 정책 하에서도 서양 문물과 사상에 깊은 관심을 가졌으며, 타카노 초에이 등 다른 난학자들과 교류하며 해안 방어 문제 등을 논의했다. 이로 인해 "난학의 큰 시주"로 불리기도 했으나, 정작 본인은 개국을 지향하며 막부의 강경한 쇄국 및 해방론에는 비판적인 입장이었다.
1837년 모리슨 호 사건 이후 막부의 이국선 타격령을 비판하는 『신기론』(慎機論)을 저술했으나, 가로라는 신분 때문에 발표하지 못했다. 그러나 1839년 만사의 옥 때 이 글이 발각되어 막부 정책을 비판했다는 죄목으로 다하라 번에서 칩거 처분을 받았다. 칩거 중 생활고를 겪었고, 자신의 존재가 번에 누를 끼칠 것을 염려하여 1841년 할복으로 생을 마감했다. 사후 메이지 시대에 명예가 회복되어 정4위에 추증되었다.
2. 1. 탄생과 고난의 유년 시절
에도 고지마치(현 도쿄도 치요다구 미야케자카 부근)에 위치한 다하라 번의 번주 저택에서 아버지 와타나베 사다미치(渡辺定通)와 어머니 사카에(栄)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와타나베 가문은 다하라 번의 상급 사무라이 가문으로, 대대로 100석의 녹봉을 받아왔으나 아버지 사다미치 대에 이르러 15인 부지(扶持, 석으로 환산 시 약 27석)로 줄어들었다. 더욱이 당시 번의 재정난으로 인한 녹봉 삭감으로 실제 수입은 12석에도 미치지 못했다.아버지 사다미치가 병약하여 약값으로 많은 비용이 들었기 때문에, 와타나베 가잔의 유년 시절은 극심한 빈곤 속에서 지나갔다. 매일 식사를 걱정해야 할 정도였으며, 동생들은 차례로 다른 집에 봉공(奉公, 고용살이)을 나가야 했다. 이러한 어려운 사정은 훗날 가잔이 장년기에 작성한 『퇴역원서 초고』(退役願書之稿)에 자세히 기록되어 있다. 가난 속에서도 학문에 힘쓰는 그의 모습은 훗날 메이지 시대 이후 태평양 전쟁 이전까지 사용된 수신 교과서에 실려 충효의 모범으로 여겨지기도 했다.
어린 시절부터 가잔은 생계를 돕기 위해 자신이 재능을 보였던 그림을 그려 팔기 시작했다. 이후 화가 타니 분쵸(谷文晁)에게 정식으로 그림을 배우면서 재능을 크게 키웠고, 20대 중반에는 이미 화가로서 이름을 알려 마침내 지독한 가난에서 벗어날 수 있게 되었다.
그림뿐만 아니라 학문에도 힘써, 다하라 번의 번사인 타카미 세이고(鷹見星皐)에게 유학(주자학)을 배웠다. 18세에는 쇼헤이자카 학문소(昌平坂学問所)에 입학하여 사토 이사이(佐藤一斎)와 마츠자키 켄도(松崎慊堂)에게 가르침을 받았다. 또한 사토 신엔(佐藤信淵)에게 농학을 배우기도 했다.
2. 2. 다하라 번사로서
다하라 번사 와타나베 사다미치(渡辺定通)와 어머니 사카에의 장남으로 에도 고지마치 근처에 있는 다하라 번 저택에서 태어났다. 와타나베 가문은 다하라 번의 상급 사무라이로 대대로 100석의 녹봉을 받았으나, 아버지 대에 27석 정도로 줄었고 이후 번의 재정난으로 12석이 채 안 될 정도로 가세가 기울었다. 게다가 아버지의 병치레로 인해 어린 시절 극심한 가난 속에서 자랐으며, 식사를 거르는 것은 물론 동생들도 일을 나가야 할 정도였다. 이러한 어려운 환경 속에서도 학문에 매진한 가잔의 이야기는 메이지 시대 이후 학생들의 수신 교과서에 실리기도 했다. 어린 가잔은 뛰어난 그림 실력을 발휘하여 생계를 도왔으며, 이후 타니 분초에게 그림을 배워 재능을 인정받아 20대 중반에는 이미 화가로서 명성을 얻어 생활고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한편 학문에도 힘써 다하라 번사 타카미 세이코(鷹見星皐)에게 유교를 배우고, 18세에는 창평횡에 다니며 사토 잇사이와 마츠자키 코도에게 배웠다. 또한 사토 노부히로에게 농학을 배우기도 했다.번사로서 가잔은 8세에 당시 번주 미야케 야스토모의 적자인 가메키치(亀吉)의 시종[伽役]을 맡았고, 가메키치가 요절한 뒤에는 그의 동생인 모토키치(元吉, 훗날 번주 미야케 야스아키)의 시종이 되어 번주 야스토모의 눈에 드는 등 어린 시절부터 번주 일가와 가까이 지냈다. 이러한 성장 배경은 가잔이 번주 일가에 대해 친밀감과 깊은 충성심을 갖게 된 계기가 되었다. 16세에 정식으로 번의 에도 저택[江戸屋敷]에 출사하여 납호역(納戸役), 사번(使番) 등 번주와 가까운 직책을 맡았다. 1823년(분세이 6년)에는 다하라 번사 와다(和田) 가문의 딸 타카(たかと)와 결혼하였고, 1825년(분세이 8년) 아버지의 사망으로 32세에 가독을 상속받아 80석의 가록을 이었다. 1826년(분세이 9년)에는 번의 교섭 담당인 취차역(取次役)을 맡았다.
1827년(분세이 10년), 번주 야스아키가 28세의 젊은 나이로 병사하자, 번 수뇌부는 어려운 번 재정을 해결하기 위해 비교적 부유했던 히메지 번에서 지참금을 받고 양자를 들이려 했다. 가잔은 이에 강하게 반발하며 용인(用人) 마키 사다마에(真木定前) 등과 함께 야스아키의 이복동생인 미야케 토모노부를 번주로 옹립하려 했으나 실패했다. 결국 번 상층부의 뜻대로 미야케 야스나오가 새로운 번주가 되었고, 가잔은 한때 실의에 빠져 술로 세월을 보내기도 했다. 그러나 가잔은 번 수뇌부 및 히메지 번과 협상하여, 토모노부의 아들(훗날의 미야케 야스야스)과 야스나오의 딸을 결혼시켜 다음 번주로 삼기로 합의를 이끌어냈다. 또한 번 수뇌부는 가잔 등 반대파를 달래기 위해 토모노부에게 전 번주의 격식을 부여하고 스가모에 저택을 마련해주는 등 우대하였다. 가잔은 토모노부의 측근[側用人]으로서 그와 가깝게 지냈으며, 훗날 가잔이 많은 난학(蘭學) 서적을 구입하고자 했을 때 토모노부가 기꺼이 자금을 지원해주기도 했다. 토모노부는 가잔 사후 40년이 지난 1881년(메이지 14년)에 가잔의 전기인 『崋山先生略伝補』를 남겼다.
1832년(덴포 3년) 5월, 가잔은 다하라 번의 연로역 말석(年寄役末席), 즉 가로 직책에 취임했다. 이미 20대 중반부터 화가로 명성을 떨쳤던 가잔은 번의 정치 중심에서는 가능한 한 멀리 떨어져 그림에 전념하고 싶어 했으나, 그의 바람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가로가 된 가잔은 번의 개혁에 힘썼다. 그는 유능한 번사를 등용하고 사기를 높이기 위해 격고제(格高制)를 도입하여, 가문의 격식보다는 실제 맡은 직책에 따라 봉록을 지급하도록 제도를 바꾸고 동시에 지출을 억제하고자 했다. 또한 농학자 오쿠라 나가츠네를 다하라 번으로 초빙하여 척산흥업(殖産興業, 산업 진흥) 정책을 추진했다. 나가츠네는 다하라에서 벼농사 기술 개량을 지도했으며, 특히 고래 기름을 이용한 벼 해충 구제법을 도입하여 큰 성과를 거두었다고 전해진다. 또한 당시 여러 번의 주요 재원이던 상품 작물 재배를 시도하여, 온난한 아쓰미 반도의 기후에 주목해 사탕수수 재배를 정착시키려 했으나 큰 성공을 거두지는 못했다. 이 외에도 붉나무, 닥나무 재배와 밀랍 제조 기술, 번사들의 부업으로 도자기 인형[土焼人形] 제조법 등을 보급했다.
1836년부터 이듬해까지 이어진 덴포 대기근 시기에는 미리 식량 비축 창고인 '보민창(報民倉)'을 설치하고, 『흉황심득서(凶荒心得書)』라는 대응 지침서를 만들어 번 전체에 기강 확립과 검약 실천, 백성 구제를 최우선으로 할 것을 강조했다. 이러한 노력 덕분에 가난한 다하라 번에서는 단 한 명의 아사자도 발생하지 않았고, 이는 전국에서 유일하게 막부로부터 표창을 받는 성과로 이어졌다. 또한 가잔은 번의 조향(助郷, 역참 운영 지원 의무) 면제를 탄원하기 위해 해방론을 명분으로 내세웠다. 이로 인해 다하라 번은 막부와 여러 번으로부터 해안 방비에 힘쓰는 번으로 인정받았지만, 이는 조향 면제를 얻기 위한 정치적 수단이었으며, 가잔 자신은 개국론을 지지하며 쇄국 정책과 해방론에는 반대하는 입장이었다.[2]
2. 3. 가로가 되다
1832년 5월, 와타나베 가잔은 다하라번의 가로(토시요리 말석)에 임명되었다. 이미 20대 중반부터 그림으로 명성을 얻고 있던 그는 번의 정치에서 벗어나 그림에 전념하고 싶어 했으나, 현실은 그의 바람과 달랐다.[24]가로가 된 가잔은 번의 개혁에 착수했다. 그는 능력 있는 인재를 등용하고 사기를 높이기 위해 신분보다는 공적에 따라 대우하는 '격고제'(格高制)를 도입했으며, 가문이 아닌 직무 중심의 봉록제를 추진하여 번의 재정 지출을 줄이려 노력했다. 또한 농학자 오쿠라 나가쓰네(大蔵永常)를 초빙하여 식산흥업 정책을 펼쳤다. 특히 고래기름을 이용한 벼 해충 구제법을 도입하여 큰 성공을 거두었다. 당시 다른 번들처럼 사탕수수와 같은 상품 작물 재배를 아쓰미반도에서 시도했으나 성공하지 못했고, 그 외에 검양옻나무나 닥나무(コウゾ) 재배, 번사들의 부업으로 진흙 인형 제작 등을 장려했다.[24]
1836년 시작된 덴포 대기근에 대비하여 미리 식량 비축 창고를 마련하고, 기근 대응 지침서인 『흉황심득서』(凶荒心得書)를 저술하는 등 철저한 대비책을 세웠다. 그는 번 전체에 절약을 강조하고 백성 구제에 힘써, 다하라번은 덴포 대기근 동안 아사자가 단 한 명도 발생하지 않은 유일한 번으로 막부로부터 표창을 받았다.[24] 그는 가로로서의 이러한 업적을 통해 능력을 인정받았다.
가잔은 해방책 강화를 명분으로 막부에 번의 스케고(조향, 助郷) 부담 면제를 요청하여 관철시켰다. 이로 인해 다하라번은 해상 방비에 힘쓰는 번으로 평가받았지만, 이는 표면적인 이유였고 실제 가잔은 개국론자였으며 쇄국정책과 연계된 해방론에는 비판적인 입장이었다.[24]
한편, 가잔은 기슈번의 유학자 엔도 가쓰스케(遠藤勝助)가 세운 상치회(尚歯会)에 참여하여 타카노 초에이 등과 교류하며 기근 대책을 논의했다. 이 과정에서 초에이는 감자와 메밀을 구황작물로 소개하는 『구황이물고』(救荒二物考)를 저술했고, 그림에 능했던 가잔이 삽화를 그렸다. 1837년 모리슨 호 사건 발생 이후, 상치회는 더욱 활발해져 난학자인 초에이, 고세키 산에이(小関三英), 하타사키 테이(幡崎鼎) 등과 막부 관료인 가와지 도시아키라(川路聖謨), 하쿠라 간도(羽倉簡堂), 에가와 히데타츠(江川英龍) 등이 참여하여 해방론 등을 깊이 토론하는 장이 되었다. 특히 에가와 히데타츠는 가잔에게 많은 조언을 얻어 막부의 해방 정책에 영향을 미치기도 했다. 이러한 활동으로 후지타 도코(藤田東湖)는 가잔을 "난학의 큰 시주"(蘭学にて大施主)라고 칭하기도 했다. 정작 가잔 자신은 스스로를 난학자로 여기지 않았지만, 당시 난학자들 사이에서 지도적인 인물로 간주되었다.[24]
일부에서는 하타사키, 가와지, 하쿠라, 에가와 등은 상치회에 직접 참여하지 않았고, 가잔과 가와지, 에가와 사이에 개인적인 친분이 있었을 뿐이라는 지적도 있다.[25] 가잔, 초에이, 산에이 등은 내심 쇄국 철폐를 원했지만, 가잔은 막부의 정책에 정면으로 반대하는 것의 위험성을 인지하고 해방론자로 위장했다. 에가와는 가잔을 진정한 해방론자로 생각하고 접근했으나, 가잔은 오히려 에가와에게 해방론의 한계를 깨우쳐 주려 했다. 결국 개국을 지향했던 가잔과 강경한 해방론자였던 에가와는 서로 다른 생각을 가진 관계였다.[25]
가잔은 가로로서 번의 개혁과 백성 구제에 힘쓰는 한편, 서구의 예술과 사상에도 깊은 관심을 보였다. 그는 유럽 회화의 명암법을 활용하여 인물을 사실적으로 묘사하는 등 일본과 유럽 예술을 융합한 독자적인 화풍을 발전시켰다. 사상적으로는 효(孝)와 주군에 대한 충성을 중시하는 전통적인 유교적 가치관을 따르면서도, 과학과 정치에 대한 서구의 새로운 사상에도 열정적인 태도를 보였다.
2. 4. "난학의 큰 시주"
기슈번의 유학자 遠藤勝助|엔도 가쓰스케일본어가 설립한 尚歯会|상치회일본어에 참가하여 高野長英 등과 기근 대책을 논의했다. 이 과정에서 타카노 초에이는 감자(馬鈴薯|바레이쇼일본어)와 메밀(早ソバ|하야소바일본어)을 구황작물로 제안한 救荒二物考|큐코니부쓰코일본어를 저술했고, 그림에 능숙했던 가잔은 이 책의 삽화를 그렸다.1837년 발생한 모리슨 호 사건을 계기로 상치회 모임은 더욱 활발해졌다. 蘭学|란가쿠일본어자인 타카노 초에이, 小関三英, 幡崎鼎|하타자키 가나메일본어 뿐만 아니라, 막부의 관리인 川路聖謨, 羽倉簡堂|하쿠라 간도일본어, 江川英龍 등도 참여하여 海防|해방일본어(해안 방어) 문제 등을 깊이 있게 토론했다. 특히 에가와 히데타카는 가잔에게 많은 영향을 받아 막부의 해방 정책에 대한 자문을 구하기도 했다. 이러한 가잔의 역할을 보고 모임에 참여했던 藤田東湖는 그를 "蘭学|란가쿠일본어의 大施主|큰 시주일본어"라고 평했다. 가잔 자신은 스스로를 란학자로 여기지 않았지만, 당시 란학자들 사이에서 지도적인 인물로 평가받았음을 보여준다.
다만 하타자키, 가와지, 하쿠라, 에가와 등은 상치회에 직접 참여한 것이 아니라, 가잔과 가와지, 에가와 사이에 개인적인 친분이 있었을 뿐이라는 지적도 있다.[25][2] 가잔이나 타카노 초에이, 오세키 산에이는 내심 쇄국의 폐지를 원했지만, 가잔은 막부의 정책에 정면으로 반대하는 것의 위험성을 인지하고 해방론자로 위장했다. 에가와는 가잔을 해방론자로 알고 접근했으나, 가잔은 오히려 에가와에게 해방론의 한계를 설명하려 했다. 결국 개국을 지향했던 가잔과 강경한 해방론자였던 에가와는 서로 다른 생각을 가진 관계였다고 평가된다.[25][2]
2. 5. 만사의 옥과 최후

1838년 모리슨 호 사건을 접한 가잔과 다카노 초에이는 막부의 이국선 타격령과 같은 강경한 쇄국 정책에 위기감을 느꼈다. 이에 가잔은 막부 정책에 반대하는 『신기론』(慎機論)을 저술했다. 하지만 이 글은 해상 방비의 허술함을 지적하면서도 막부의 눈치를 보느라 명확한 대안을 제시하지 못했고, 개국을 주장하지도 못하는 등 논지가 다소 모호했다. 결국 막부 관료들에 대한 비판으로 마무리되었으나, 다하라 번의 가로라는 신분 때문에 다카노 초에이가 『무술몽이야기』(戊戌夢物語)를 익명으로 쓴 것과 달리 공개적으로 발표하지 못하고 초고 상태로 보관했다. 그러나 약 반년 뒤 만사의 옥 때 가택 수색 과정에서 이 원고가 발견되어 처벌의 빌미가 되었다.[3]
과거 만사의 옥은 막부의 보수적인 메츠케(目付, 감찰관) 도리이 요조가 서양 학문인 난학(蘭學)을 연구하는 학자들을 탄압하기 위해 일으킨 사건으로 알려졌다. 이는 메이지 시대 후지타 시게키치가 자유민권운동의 관점에서 해석한 영향이 컸다.[26][27][4] 그러나 실제로는 도리이 요조와 에가와 히데타카 사이의 갈등이 주요 원인이었다는 통설이 있다. 1839년 5월, 도리이는 에가와와 그 동료들을 제거하려 했으나, 에가와는 로주(老中, 막부 최고 관직) 미즈노 다다쿠니의 비호로 무사했다. 반면 가잔은 가택 수색에서 『신기론』 원고가 발견되면서, 번의 가신 신분으로 국가 정책을 함부로 비판했다는 죄목으로 고향인 다하라 번에서 칩거 처분을 받았다.
이러한 통설에 대해, 에도만 순시 당시 도리이와 에가와 사이에 대립이 있었던 것은 사실이지만 두 사람은 원래 친밀했으며 도리이가 실각하는 1844년까지 교류가 지속되었다는 반론도 있다. 도리이가 만사의 옥 1년 전부터 하나이 코이치(花井虎一)를 이용해 가잔의 동향을 감시했던 점을 고려하면, 만사의 옥은 도리이가 『무술몽이야기』의 저자를 찾는다는 명분으로, 당시 "난학의 큰 후원자"로 알려진 가잔을 제거하고 쇄국 완화 움직임에 본보기를 보이려 기획한 사건이라는 해석도 설득력이 있다.[28][2]
1841년 다하라에서 칩거 중이던 가잔은 생활고에 시달렸다. 이를 안타깝게 여긴 문인 후쿠다 한코가 에도에서 가잔의 그림과 글씨를 파는 모임을 열어 생활비를 마련해주었다. 하지만 이 사실이 막부에 알려져 문제가 될 수 있다는 소문이 돌자, 가잔은 자신의 존재가 번에 해를 끼친다고 생각해 "불충불효 와타나베 노보루(不忠不孝渡辺登)"라는 글을 남기고 할복하여 생을 마감했다.
가잔의 주요 저서로는 『초고 서양사정서』(初稿西洋事情書), 『재고 서양사정서』(再稿西洋事情書), 『외국사정서』(外国事情書), 『격설혹문』(鴃舌或問), 『격설소기』(鴃舌小記) 등이 있다.
가잔 사후에도 번 내 반대파의 압력과 막부의 감시 때문에 아들 와타나베 쇼카가 가문의 지위를 회복한 뒤에도 오랫동안 묘를 세우지 못했다. 막부가 가잔의 명예 회복과 묘 건립을 허락한 것은 에도 막부 멸망 직전인 1868년 4월 7일(게이오 4년 3월 15일)이었다. 안타깝게도 쇼카를 포함한 가잔의 자녀들에게 후사가 없어 메이지 시대에 가계는 단절하게 되었다.
1891년 가잔은 정사위(正四位)에 추증되었고,[29][1] 1946년에는 다하라성 터에 가잔을 모시는 화산신사가 세워졌다.
3. 가잔의 예술
와타나베 가잔은 생계를 위해 그림을 시작했으나 뛰어난 재능을 발휘하여 독자적인 예술 세계를 구축했다. 그는 스승 타니 분쵸(谷文晁)의 영향을 받아 남화(南画)를 비롯한 동양의 전통 화법을 익히는 동시에, 서양화의 음영법 등을 수용하여 인물 묘사에서 뛰어난 사실성을 구현했다. 특히 청나라 화가 운격(惲格)의 영향을 받은 문인화풍과 서양화 기법을 결합하여, 기존의 틀을 넘어서는 독창적인 화풍을 만들어낸 것으로 평가받는다.
가잔의 예술은 단순히 대상을 사실적으로 묘사하는 데 그치지 않고, 그의 넓은 식견과 사회에 대한 관심을 반영하는 특징을 보인다. 그는 문인화가로서 글과 그림에 모두 능했으며, 기행문과 삽화를 통해 당시의 사회상과 풍속을 기록으로 남기기도 했다. 그의 작품은 동양과 서양의 예술 요소를 융합하고 시대정신을 담아내려 한 점에서 일본 근대 미술의 선구적인 면모를 보여준다.
3. 1. 주요 작품



와타나베 가잔은 어린 시절부터 생계를 유지하기 위해 그림을 그렸다. 처음에는 삼촌인 히라야마 분쿄(平山文鏡)에게 그림을 배웠고, 이후 시라카와 시잔(白川芝山)에게 배웠으나 명확하지 않은 이유로 파문당했다. 이후 아버지의 도움으로 가네코 긴료(金子金陵)의 제자가 되었다.[30] 가네코 긴료에게 배운 후 가잔의 그림 실력은 크게 향상되었다. 처음에는 등롱에 그림을 그리는 일을 도우며 그림을 빠르게 그리는 기술을 익혔는데, 이는 훗날 여행 중 본 풍경을 신속하게 그림으로 남기는 데 큰 도움이 되었다.
또한 가네코 긴료의 스승인 타니 분쵸(谷文晁)에게도 가르침을 받았다. 타니 분쵸는 가잔의 재능을 알아보고 문인화가로서의 길을 열어주었으며, 가잔은 그를 통해 남화(南画)를 비롯한 여러 화풍을 흡수할 수 있었다. 특히 문인화에서는 청나라의 화가 운격(惲格)에게 큰 영향을 받았다. 가잔은 초상화에서 음영을 정교하게 사용하여 뛰어난 사실감을 표현했으며, 서양화의 영향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이를 넘어서는 독자적인 화풍을 만들어냈다. 대표적인 초상화 작품으로는 「타카미 센세키 초상(鷹見泉石像)」, 「사토 잇사이 초상(佐藤一斎像)」, 「이치카와 베이안 초상(市河米庵像)」 등이 있다.


가잔이 사실성에 얼마나 깊이 몰두했는지를 보여주는 일화가 있다. 1835년 친구이자 화가인 다키자와 긴레이(滝沢琴嶺)가 세상을 떠나자, 가잔은 장례식장에서 친구의 아버지인 교쿠테이 바킨(曲亭馬琴)으로부터 초상화 제작을 의뢰받았다. 당시에는 고인의 초상화를 사후 기억에 의존해 그리는 경우가 많았으나, 가잔은 이러한 관행을 따르지 않고 직접 관을 열어 친구의 얼굴을 자세히 관찰하고 만져가며 그림을 그렸다고 한다.[31] 이는 당시의 사회적 통념이나 관습에서 벗어난 파격적인 행동이었다.
처음에는 가난에서 벗어나기 위해 그림을 그렸지만, 타고난 재능과 넓은 시야, 폭넓은 인맥을 바탕으로 그의 예술 세계는 크게 확장되었다. 대표작 중 하나인 「일소백태도(一掃百態図)」는 당시의 다양한 풍속을 생생하게 담아낸 작품이다.
문인으로서 남긴 작품으로는 수필과 기행문인 『전락당일록(全楽堂日録)』, 『닛코기행(日光紀行)』 등이 있다. 이 작품들에는 글과 함께 삽화가 실려 있어 여행지의 풍경을 잘 묘사하고 있으며, 당시의 문화와 풍속을 이해하는 데 귀중한 자료가 된다.
제자로는 츠바키 친잔(椿椿山), 후쿠다 한코(福田半香) 등이 있으며, 막내 동생인 조잔(如山)에게 그림을 가르쳐 화가로 키우려 했으나 22세의 젊은 나이로 요절했다.
'''주요 작품 목록'''
작품명 | 기법 | 형태·수량 | 소장처 | 제작연도 | 비고 |
---|---|---|---|---|---|
거북받침 금모도 (亀台金母図) | 종이에 채색 | 1폭 | 다하라시 박물관 (田原市博物館) | 분카 8년(1811) | |
갈대밭의 두 오리 그림 (蘆汀双鴨図)[7] | 비단에 채색 | 1폭 | 조요 갤러리 (常葉ギャラリー) | 분카 11년(1814) | |
고사 애호도 (高士愛虎図) | 종이에 먹그림 담채 | 1폭 | 세이카도 분코 미술관 (静嘉堂文庫美術館) | 분카 12년(1815) | |
여공조위도 (呂公釣渭図)[8] | 비단에 채색 | 1폭 | 개인 소장 | 분카 13년(1816) | 시즈오카현 지정 유형 문화재 |
서왕모도 (西王母図)[9] | 비단에 채색 | 1폭 | 조요 갤러리 (常葉ギャラリー) | 분카 13년(1816) | |
삼십육가선도 (三十六歌仙図) | 종이에 먹그림 담채 | 하마마쓰시 미술관 | 분카 13년(1816) | ||
가을풀과 작은 새 그림 (秋草小禽図) | 비단에 채색 | 1폭 | 다하라시 박물관 (田原市博物館) | 분세이 원년(1818) | |
일소백태도 (一掃百態図) | 종이에 채색 | 1책 | 다하라시 박물관 (田原市博物館) | 분세이 원년(1818) | 중요문화재 |
사토 잇사이 초상화 원고 제2 (佐藤一斎像画稿第二) | 종이에 먹그림 담채 | 1폭 | 개인 소장 | 분세이 4년(1821)경 | 중요미술품 |
사토 잇사이 초상화 원고 제3 (佐藤一斎像画稿第三) | 종이에 먹그림 담채 | 1폭 | 지바시 미술관 (千葉市美術館) | 분세이 4년(1821)경 | |
사토 잇사이 초상화 원고 제4 (佐藤一斎像画稿第四) | 종이에 먹그림 담채 | 1폭 | 지바시 미술관 (千葉市美術館) | 분세이 4년(1821)경 | |
사토 잇사이 초상화 원고 제5 (佐藤一斎像画稿第五) | 종이에 먹그림 담채 | 1폭 | 지바시 미술관 (千葉市美術館) | 분세이 4년(1821)경 | |
사토 잇사이 초상화 원고 제6 (佐藤一斎像画稿第六) | 종이에 먹그림 담채 | 1폭 | 지바시 미술관 (千葉市美術館) | 분세이 4년(1821)경 | |
사토 잇사이 초상화 원고 제7 (佐藤一斎像画稿第七) | 종이에 먹그림 담채 | 1폭 | 지바시 미술관 (千葉市美術館) | 분세이 4년(1821)경 | |
사토 잇사이 초상화 원고 제11 (佐藤一斎像画稿第十一) | 종이에 먹그림 담채 | 1폭 | 개인 소장 | 분세이 4년(1821)경 | 중요미술품 |
사토 잇사이 초상 (佐藤一斎像) | 비단에 채색 | 1폭 | 도쿄 국립박물관 | 분세이 4년(1821) | 중요문화재 |
임오도고 (壬午図稿) | 종이에 먹그림 담채 | 1책 | 다하라시 박물관 (田原市博物館) | 분세이 5년(1822) | 중요미술품 |
타치하라 스이켄 초상화 원고 (立原翠軒像画稿) | 종이에 먹그림 담채 | 1폭 | 다하라시 박물관 (田原市博物館) | 분세이 6년(1823) | 중요미술품 |
와타나베 하스 초상화 원고 (渡辺巴洲像画稿) | 종이에 먹그림 | 1폭 | 다하라시 박물관 (田原市博物館) | 분세이 7년(1824) | 중요문화재 |
와타나베 하스 초상화 원고 (5도) (渡辺巴洲像画稿(五図)) | 종이에 먹그림 담채 | 1폭 | 다하라시 박물관 (田原市博物館) | 분세이 7년(1824) | 중요문화재 |
사국 진경도 (四州真景図) | 종이에 먹그림 담채 | 3권 | 개인 소장 | 분세이 8년(1825) | 중요문화재 |
십우쌍작도 (十友双雀図) | 비단에 채색 | 1폭 | 개인 소장 | 분세이 9년(1826) | 중요미술품 |
마츠자키 켄도 초상화 원고 제1 (松崎慊堂像画稿その一) | 종이에 먹그림 담채 | 1폭 | 개인 소장 | 분세이 9년(1826) | 중요미술품 |
마츠자키 켄도 초상화 원고 제2 (松崎慊堂像画稿その二) | 종이에 먹그림 담채 | 1폭 | 개인 소장 | 덴포 연간 | 중요미술품 |
전락당 일록 (全楽堂日録)[10] | 종이에 먹그림 담채 | 1책 | 개인 소장 | 분세이 13년(1830)~덴포 4년(1833) | 아이치현 지정 문화재 |
하야시 쥬사이 초상화 원고 (林述斎像稿) | 종이에 먹그림 담채 | 1폭 | 다하라시 박물관 (田原市博物館) | 덴포 연간 | |
타케나카 모토마사 초상 (竹中元真像) | 종이에 먹그림 담채 | 1폭 | 다하라시 박물관 (田原市博物館) | 덴포 연간 | |
자필 필사본 (충효) (自筆手本(忠孝)) | 종이에 먹글씨 | 1폭 | 다하라시 박물관 (田原市博物館) | 덴포 연간 | 중요문화재 |
동명 병풍 (東銘屏風) | 종이에 먹글씨 | 2폭 1쌍 | 다하라시 박물관 (田原市博物館) | 덴포 연간 | |
풍건선사 기호도 (豊干禅師騎虎図) | 종이에 먹그림 | 1폭 | 다하라시 박물관 (田原市博物館) | 덴포 연간 | |
하이가 첩 (俳画冊) | 종이에 먹그림 담채 | 2책 | 다하라시 박물관 (田原市博物館) | 덴포 연간 | |
월하명기도 (月下鳴機図) | 비단에 채색 | 1폭 | 세이카도 분코 미술관 (静嘉堂文庫美術館) | 덴포 연간 | 중요미술품 |
모무유기도 (毛武游記図巻)[11] | 종이에 먹그림 | 1권 | 조요 갤러리 (常葉ギャラリー) | 덴포 2년(1831) | |
객좌장기 (客坐掌記) | 종이에 먹그림 담채 | 1책 | 다하라시 박물관 (田原市博物館) | 덴포 3년(1832) | 중요미술품 |
객참록 (客参録) | 종이에 먹그림 담채 | 1책 | 개인 소장 | 덴포 4년(1833) | 아이치현 지정 문화재 |
사선축수도 (芝仙祝寿図) | 비단에 채색 | 1폭 | 다하라시 박물관 (田原市博物館) | 덴포 4년(1833) | |
다키자와 킨레이 초상 (滝沢琴嶺像) | 비단에 채색 | 1폭 | 개인 소장, 덴리대학 부속 덴리도서관 위탁 | 덴포 6년(1835) | |
타카미 센세키 초상 (鷹見泉石像)[12] | 비단에 채색 | 1폭 | 도쿄 국립박물관 | 덴포 8년(1837) | 국보 |
미소짓는 무사 초상화 원고 (笑顔武士像稿) | 종이에 먹그림 담채 | 1폭 | 개인 소장 | 덴포 8년(1837) | 중요미술품 |
이치카와 베이안 초상화 원고 (市河米庵像画稿) | 종이에 먹그림 담채 | 1폭 | 교토 국립박물관 | 덴포 연간 | 중요문화재 |
이치카와 베이안 초상 (市河米庵像) | 비단에 채색 | 1폭 | 교토 국립박물관 | 덴포 8년(1837) | 중요문화재 |
게이샤 그림 (芸妓図) | 비단에 채색 | 1폭 | 세이카도 분코 미술관 (静嘉堂文庫美術館) | 덴포 9년(1838) | 중요문화재 |
계산세우도 (溪山細雨図) | 비단에 채색 | 1폭 | 세이카도 분코 미술관 (静嘉堂文庫美術館) | 덴포 9년(1838) | 중요미술품 |
객좌장기 (客坐掌記) | 종이에 먹그림 담채 | 1책 | 다하라시 박물관 (田原市博物館) | 덴포 9년(1838) | 중요미술품 |
공자 초상 (孔子像) | 비단에 채색 | 1폭 | 다하라시 박물관 (田原市博物館) | 덴포 9년(1838) | 중요문화재 |
히나마쓰리 그림 (雛祭図) | 비단에 채색 | 1폭 | 다하라시 박물관 (田原市博物館) | 덴포 9년(1838) | |
서명 병풍 (西銘屏風) | 종이에 먹글씨 | 2폭 1쌍 | 다하라시 박물관 (田原市博物館) | 덴포 9년(1838) | |
령모충어화첩 (翎毛虫魚画帖)[13] | 종이에 먹그림 담채 | 2책 | 소운미술관 | 덴포 9년(1838)~덴포 12년(1841) | |
등나무꽃과 참새 그림 (藤花雀蜂図) | 비단에 채색 | 1폭 | 다하라시 박물관 (田原市博物館) | 덴포 10년(1839) | |
옥정소묘 및 기록 (獄廷素描及び記録) | 종이에 먹그림 | 1권 | 다하라시 박물관 (田原市博物館) | 덴포 10년(1839)~덴포 11년(1840) | 중요문화재 |
여위고 말 그림 (痩馬図) | 종이에 먹그림 담채 | 1폭 | 다하라시 박물관 (田原市博物館) | 덴포 11년(1840) | |
유어도(해착도) (遊魚図(海錯図)) | 비단에 채색 | 1폭 | 세이카도 분코 미술관 (静嘉堂文庫美術館) | 덴포 11년(1840) | 중요문화재 |
이어도 (異魚図) | 종이에 먹그림 담채 | 1폭 | 개인 소장 | 덴포 11년(1840) | 중요미술품 |
히포크라테스 초상 (ヒポクラテス像)[14] | 비단에 채색 | 1폭 | 규슈 국립박물관 | 덴포 11년(1840) | 중요미술품 |
모란 그림 (牡丹図) | 비단에 담채 | 1폭 | 다하라시 박물관 (田原市博物館) | 덴포 12년(1841) | 중요미술품 |
젖먹이 강아지 그림 (乳狗図)[15] | 비단에 채색 | 1폭 | 쿠로카와 고문화연구소 | 덴포 12년(1841) | |
충어첩고 (蟲魚帖稿)[16] | 종이에 먹그림 | 14엽 | 하마마쓰시 미술관 | 덴포 12년(1841) | 시즈오카현 지정 유형 문화재 |
충어첩 (蟲魚帖)[17] | 비단에 채색 | 1첩 | 오카다 미술관 | 덴포 12년(1841) | 중요문화재 |
우공고문도 (于公高門図)[18] | 비단에 채색 | 1폭 | 후쿠다 미술관 | 덴포 12년(1841) | 중요문화재 |
천산만수도 (千山万水図) | 비단에 채색 | 1폭 | 다하라시 박물관 (田原市博物館) | 덴포 12년(1841) | 중요문화재 |
황량일취도 (黄粱一炊図) | 비단에 채색 | 1폭 | 개인 소장 | 덴포 12년(1841) | 중요미술품 |
자필 묘비명(불충불효 와타나베 노보루) (自筆墓表(不忠不孝渡辺登)) | 종이에 먹글씨 | 1폭 | 다하라시 박물관 (田原市博物館) | 덴포 12년(1841) | 중요문화재 |
'''작품 이미지'''
4. 평가
와타나베 가잔은 에도 시대 후기의 중요한 화가이자 사상가로 평가받는다. 그는 어린 시절부터 생계를 위해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으며, 여러 스승을 거치며 실력을 키웠다. 특히 다니 분초(谷文晁)에게 배우면서 남화(南画)를 비롯한 다양한 화풍을 흡수했고, 청나라 화가 운격(惲格)에게서도 영향을 받았다. 그의 그림은 서양화의 영향을 받아 음영을 정교하게 사용하여 뛰어난 사실감을 보여주는 것이 특징이다. 이는 당시 일본 화단에서는 보기 드문 독자적인 화풍으로 평가받는다. 대표적인 초상화 작품으로는 「다카미 센세키(鷹見泉石)상」, 「사토 잇사이(佐藤一斎)상」, 「이치카와 베이안(市河米庵)상」 등이 있다.[30]
가잔이 사실성에 얼마나 깊이 몰두했는지는 친구였던 화가 다키자와 긴레이(滝沢琴嶺)의 초상화를 그린 일화에서 잘 드러난다. 1835년 친구가 죽자 장례식장에서 아버지 교쿠테이 바킨의 의뢰를 받은 가잔은, 관행과 달리 관을 열어 친구의 얼굴을 직접 보고 만져가며 초상화를 그렸다고 한다.[31] 이는 당시의 관습에서 벗어난 행동이었으나 그의 사실주의적 태도를 보여주는 사례이다. 또한, 그는 당시의 풍속을 생생하게 담아낸 「일소백태도(一掃百態図)」와 같은 작품을 남기기도 했다.
사상가로서 가잔은 전통적인 유교적 가치관을 따르면서도 서양의 과학과 정치 사상에 깊은 관심을 보였다. 그는 모리슨 호 사건 이후 막부의 이국선 타격령에 위기감을 느끼고 이를 비판하는 『신기론(慎機論)』을 저술했다. 그러나 이 책은 해방론을 비판하면서도 해상 방비의 허술함을 지적하는 등 논지가 명확하지 않고 막부 관료에 대한 비판으로 마무리되어 그의 복잡한 입장을 보여준다. 결국 이 글은 만사의 옥 당시 가택 수색에서 발견되어 그가 처벌받는 빌미가 되었다.
만사의 옥은 전통적으로 막부의 보수파 관료 도리이 요조(鳥居耀蔵)가 난학자들을 탄압하기 위해 일으킨 사건으로 알려졌으나[26][27], 최근에는 『무술꿈이야기』(戊戌夢物語)의 저자를 찾는 과정에서 난학의 후원자로 알려진 가잔을 표적으로 삼아 쇄국 완화 주장에 본보기를 보이기 위해 기획된 사건이라는 견해도 있다.[28]
가잔은 다하라 번의 가로(家老)로서 덴포 대기근 당시 번 내에서 아사자가 나오지 않도록 노력하는 등 행정가로서의 면모도 보였다. 그러나 만사의 옥으로 인해 다하라 번에서 칩거하게 되었고, 생활고를 돕기 위해 제자들이 연 그림 판매 행사가 문제가 될 것을 우려하여 1841년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할복).
저서명 | 원제 | 비고 |
---|---|---|
서양사정서 초고 | 『初稿西洋事情書』 | |
서양사정서 재고 | 『再稿西洋事情書』 | |
외국사정서 | 『外国事情書』 | |
신기론 | 『慎機論』 | 만사의 옥의 빌미가 됨 |
격설혹문 | 『鴃舌或問』 | |
격설소기 | 『鴃舌小記』 | |
전락당일록 | 『全楽堂日録』 | 수필 기행문 |
닛코기행 | 『日光紀行』 | 수필 기행문 |
사후 한동안 그의 묘를 세우는 것조차 허락되지 않았으나 메이지 유신 직전인 1868년에야 묘가 세워졌다. 1891년에는 정4위에 추증되어 사후에 명예를 회복했다.[29] 그의 제자로는 쓰바키 진잔(椿椿山), 후쿠다 한코(福田半香) 등이 있다.
5. 관련 인물
- '''와타나베 사다미치'''(渡辺定通): 아버지. 다하라번의 상급 사무라이였으나 녹봉이 크게 삭감되어 가잔은 어려운 유년 시절을 보냈다.[24]
- '''사카에'''(栄): 어머니.
- '''타카'''(たか): 아내. 1823년 결혼한 다하라 번사 와다(和田) 집안 출신이다.
- '''와타나베 쇼카'''(渡辺小華): 아들. 아버지가 사망한 후 와타나베 가문을 이었으나, 이후 대가 끊겼다.
- '''조잔'''(如山): 막내동생. 가잔이 그림 공부를 시켜 화가로 만들려 했으나 22세로 요절했다.
- '''미야케 야스토모'''(三宅康友): 가잔이 섬긴 다하라번 번주.
- '''가메키치'''(亀吉): 야스토모의 적자. 가잔이 어릴 적 시종으로 모셨으나 요절했다.
- '''미야케 야스테루'''(三宅康明): 야스토모의 차남이자 가메키치의 동생. 가잔이 시종으로 모셨으며 훗날 번주가 되었다. 1827년 28세로 병사했다.
- '''미야케 토모노부'''(三宅友信): 야스테루의 배다른 동생. 야스테루 사후 가잔 등이 번주로 옹립하려 했으나 실패했다. 이후 가잔의 후원자가 되어 난학서 구입 비용을 지원했으며, 가잔 사후 그의 전기 『崋山先生略伝補』를 남겼다.
- '''미야케 야스나오'''(三宅康直): 야스테루 사후 히메지번에서 양자로 들어와 다하라번의 새 번주가 되었다.
- '''미야케 야스요시'''(三宅康保): 야스나오의 딸과 토모노부의 아들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로, 훗날 번주가 되었다.
- '''타니 분쵸'''(谷文晁): 가잔의 그림 스승. 가잔의 재능을 인정하고 문인화가로서 모범이 되었다.
- '''타카미 세이코'''(鷹見星皐): 가잔의 유학 스승. 다하라 번사였다.
- '''사토 잇사이'''(佐藤一斎): 가잔의 유학 스승. 창평횡(昌平黌)에서 가르침을 받았다. 가잔은 그의 초상화를 남겼다.
- '''마츠자키 코도'''(松崎慊堂): 가잔의 유학 스승. 창평횡에서 가르침을 받았다.
- '''사토 노부히로'''(佐藤信淵): 가잔의 농학 스승.
- '''히라야마 분쿄'''(平山文鏡): 가잔의 삼촌이자 첫 그림 스승.
- '''시라카와 시잔'''(白川芝山): 가잔의 초기 그림 스승.
- '''가네코 긴료'''(金子金陵): 가잔의 그림 스승. 그의 지도로 가잔의 그림 실력이 향상되었다.
- '''타카노 초에이'''(高野長英): 난학자이자 상치회 동료. 가잔과 함께 기근 대책을 논의하고 『구황이물고』(救荒二物考)를 저술했으며, 모리슨 호 사건 이후 막부 정책을 비판하는 『무술꿈이야기』(戊戌夢物語)를 익명으로 발표했다. 만사의 옥에 연루되어 탄압받았다.
- '''오세키 산에이'''(小関三英): 난학자이자 상치회 동료.
- '''하타자키 테이'''(幡崎鼎): 난학자이자 상치회 동료.
- '''가와지 토시아키라'''(川路聖謨): 막부 신하. 상치회에 직접 참여하지는 않았으나 가잔과 교류했다.
- '''하구라 히로미치'''(羽倉簡堂): 막부 신하. 상치회에 직접 참여하지는 않았으나 가잔과 교류했다.
- '''에가와 히데타츠'''(江川英龍): 막부 신하. 상치회에 직접 참여하지는 않았으나 가잔과 교류하며 해방책에 대한 조언을 얻었다. 해방론자였던 에가와와 개국론자였던 가잔은 서로 다른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25] 만사의 옥 당시 토리이 요조의 표적이 되었으나 로쥬 미즈노 타다쿠니의 비호로 무사했다.
- '''후지타 토코'''(藤田東湖): 미토번 학자. 상치회 모임에 참여했으며 가잔을 "난학의 큰 시주"(蘭学にて大施主)라고 불렀다.
- '''엔도 카츠스케'''(遠藤勝助): 기슈번 유학자. 상치회를 설립했다.
- '''오쿠라 나가츠네'''(大蔵永常): 농학자. 가잔의 초빙으로 다하라번에 와서 식산흥업 정책을 도왔으며, 특히 고래기름을 이용한 해충 구제법을 도입하여 성과를 냈다.
- '''츠바키 친잔'''(椿椿山): 가잔의 제자. 화가.
- '''후쿠다 한코'''(福田半香): 가잔의 제자. 화가. 가잔이 타하라번에서 근신할 때 그의 생활고를 돕기 위해 그림 판매회를 열었다.
- '''교쿠테이 바킨'''(曲亭馬琴): 작가. 친구이자 화가였던 타키자와 킨레이(滝沢琴嶺)의 아버지로, 아들의 사후 가잔에게 초상화를 의뢰했다. 가잔은 관을 열어 친구의 얼굴을 직접 보고 그렸다는 일화가 있다.[31]
- '''토리이 요조'''(鳥居耀蔵): 막부의 메츠케(감찰관). 보수파 관료로, 난학자들을 탄압한 만사의 옥을 일으킨 핵심 인물로 알려져 있다. 에가와 히데타츠와의 불화가 사건의 원인 중 하나라는 설과, 처음부터 가잔을 표적으로 삼았다는 설이 있다.[26][27][28]
- '''사쿠라마 세이가이'''(桜間青厓): 화가. 가잔 및 그의 제자들과 교류했다.
참조
[1]
간행물
叙任及辞令
官報
1891-12-18
[2]
서적
「蛮社の獄」のすべて
吉川弘文館
2011
[3]
뉴스
19世紀後半、黒船、地震、台風、疫病などの災禍をくぐり抜け、明治維新に向かう(福和伸夫)
https://news.yahoo.c[...]
Yahoo!ニュース
2020-08-24
[4]
간행물
文明東漸史
[5]
서적
渡辺崋山
[6]
서적
後の為の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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渡辺崋山 蘆汀双鴨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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常葉大学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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静岡県スポーツ・文化観光部文化局文化財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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渡辺華山手録1.全楽堂日録2.客参録3.客退紀聞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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愛知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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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웹사이트
渡辺崋山 毛武游記図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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常葉大学
2023-12-25
[12]
웹사이트
鷹見泉石像(たかみせんせきぞう)
https://www.tnm.jp/m[...]
東京国立博物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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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
웹사이트
紙本淡彩 翎毛虫魚画帖(渡辺崋山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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足利市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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웹사이트
ヒポクラテス像
https://collection.k[...]
九州国立博物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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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
웹사이트
渡辺崋山 乳狗図
http://www.kurokawa-[...]
黒川古文化研究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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웹사이트
しずおか文化財ナビ 蟲魚帖稿
https://www.pref.shi[...]
静岡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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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
웹사이트
虫魚帖
https://www.okada-mu[...]
岡田美術館
2023-12-25
[18]
웹사이트
福田美術館 コレクション
https://fukuda-art-m[...]
福田美術館
2023-12-25
[19]
웹사이트
鷹見泉石像
https://emuseum.nich[...]
[20]
웹사이트
佐藤一斎像
https://emuseum.nich[...]
[21]
웹사이트
市河米庵像
https://emuseum.nich[...]
[22]
웹사이트
歴史探訪クラブ
https://www.taharamu[...]
田原市
2021-09-25
[23]
간행물
叙任及辞令
官報
1891-12-18
[24]
서적
「蛮社の獄」のすべて
吉川弘文館
2011
[25]
서적
「蛮社の獄」のすべて
[26]
간행물
文明東漸史
[27]
문서
昭和戦時下、左翼文学者の藤森成吉らが崋山を好んで描き、左翼運動の隠喩とした。
[28]
서적
「蛮社の獄」のすべて
[29]
간행물
叙任及辞令
官報
1891-12-18
[30]
서적
渡辺崋山
[31]
서적
後の為の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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